오늘날 대한민국은 '치킨 공화국'이라 불릴 만큼 닭 요리에 진심인 민족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연간 닭고기 소비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치킨 문화'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즐기는 튀긴 닭이 오로지 서구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해입니다.
최근 인기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흑백요리사2>에서 한식 대가 임성근 셰프가 재현한 '포계(炮鷄)'는 우리가 500년 전부터 이미 고도의 기름 조리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오늘은 조선 초기 고조리서에 기록된 포계의 역사적 마스터플랜과 그 속에 담긴 미학적, 과학적 원리를 심층 분석해 보겠습니다.

1. 《산가요록(山家要錄)》에 기록된 포계의 역사적 마스터플랜
포계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1450년경 조선 초기 어의 전순의가 집필한 《산가요록》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 문헌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요리서 중 하나로, 조선 초기 사대부 계층의 정교한 식생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설계도와 같습니다.
전순의, 시대의 설계자이자 식치의 대가
전순의는 단순히 왕의 병을 고치는 의원을 넘어, '음식이 곧 약'이라는 식치(食治)의 관점에서 재료의 궁합을 설계한 인물입니다. 그가 기록한 포계는 당시 소고기 섭취가 국가적으로 엄격히 제한되던 '우금령'의 시기에, 닭이라는 식재료를 어떻게 하면 소고기 이상의 가치를 지닌 요리로 격상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입니다. 《산가요록》에 기록된 포계의 조리법은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보았을 때 매우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기름 조리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조리법의 구조적 분석: 지짐과 조림의 완벽한 레이어링
포계는 한자로 '통째로 구울 포(炮)'와 '닭 계(鷄)'를 사용합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요리는 닭을 기름에 지져내어 익히는 방식을 취합니다. 현대의 딥 프라잉 방식이 건물의 외장을 페인트로 완전히 덮어버리는 통일된 방식이라면, 포계는 기름을 적절히 두르고 노릇하게 구워낸 뒤 간장, 식초, 참기름 등을 더해 다시 한번 졸여내는 '레이어링' 기법을 사용합니다. 이는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면서도 양념의 풍미를 겹겹이 쌓아 올리는 고도의 설계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2. 두태기름(콩팥 기름)의 과학: 풍미의 골조를 세우다
임성근 셰프가 이번 포계를 재현하며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바로 '두태기름'의 사용이었습니다. 건축에서 어떤 목재나 석재를 쓰느냐에 따라 건물의 내구성과 분위기가 결정되듯, 요리에서 유지(油脂)의 선택은 맛의 베이스가 되는 골조를 세우는 작업과 같습니다.
왜 하필 두태기름이었을까? 동물성 지방의 미학
두태기름은 소의 콩팥 주위에 붙어 있는 깨끗한 지방 조직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인 식용유가 없던 시절, 우리 선조들은 동물성 지방이 가진 고유의 풍미를 요리에 적극 활용했습니다. 두태기름은 현대 요리학적으로 보았을 때도 매우 탁월한 선택입니다.
첫째, 열안정성과 풍미의 밀도입니다. 두태기름은 일반 식물성 기름보다 고소함의 밀도가 훨씬 높으며, 가열 시 특유의 감칠맛을 내뿜습니다.
둘째, 마이야르 반응의 극대화입니다. 고온에서 단백질과 당이 반응하며 갈색의 바삭한 층을 형성하는데, 두태기름은 이 반응을 돕는 최고의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수분 제어와 겉바속촉의 원형
포계의 핵심은 닭고기 겉면을 빠르게 지져내어 내부의 육즙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임성근 셰프는 방송에서 이 과정을 '코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500년 전 선조들은 이미 기름의 온도를 제어하여 재료의 수분을 가두는 '겉바속촉'의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을 넘어, 과학적 원리가 적용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한식의 위상을 보여줍니다.
3. 전략적 비평: 포계는 현대 치킨의 정신적 조상인가?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과연 포계를 현대의 프라이드치킨과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요? 엄밀히 말해 포계는 현대의 치킨과는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현대 치킨이 밀가루나 전분으로 된 '두꺼운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잠기게 하는 방식이라면, 포계는 튀김옷 없이 원재료 자체를 기름에 익히는 '양념 지짐 요리'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기름을 매개체로 한 고난도의 열 제어 기술'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포계는 충분히 현대 치킨의 정신적 조상격이라 부를 만합니다. 특히 짠맛(간장), 단맛(꿀 또는 배즙), 신맛(식초)의 밸런스를 기름의 고소함과 결합한 것은 현대의 '간장 치킨'이나 '갈비 치킨'의 조리 공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이러한 미식적 설계 능력은 당시 조선의 식문화가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를 반증합니다.
4. 마치며: '덧셈'보다 무거운 '뺄셈'의 미학
임성근 셰프가 재현한 포계 한 접시에는 50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와 선조들이 설계한 깊은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경험이 농축된 거장일수록 불필요한 장식을 덜어내고 본질에 집중하듯, 포계는 화려한 소스 대신 재료 본연의 맛과 기름의 풍미만으로 정면 승부하는 요리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즐기는 음식이 가진 역사적 뿌리를 이해하는 것은, AI와 디지털이 지배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인간적인 사색'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임성근 셰프가 보여준 포계의 복원은 단순히 과거의 맛을 되살린 것을 넘어, 우리 한식이 나아가야 할 '전통 기반의 혁신'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번 [미식의 유산] 첫 번째 시간을 통해 한식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끼셨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눈 내리는 겨울밤, 선조들이 즐겼던 낭만적인 고기구이 '설야멱(雪夜覓)'에 담긴 온도 조절의 과학을 다뤄보겠습니다.